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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부르크연구소(Warburg Institute)는 오랫동안 세계의 미술사학자·문화사학자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모든 인문계 연구소들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 연구소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갖게 된 것은 1970년 경 서울대 미학과 재학 시절에 이 이름을 접하면서 부터였고, 이후 미술사라는 학문에 몸담으면서 ‘학문은 저렇게 해야지’ 하는 부러움으로 지켜 봐 왔습니다. 내가 바르부르크연구소를 언급하면 주변에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꿔야지. 이 나라의 문화와 학문풍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구나 연구소를 세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연구소가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고, 학자들 간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설립목적에 따라 해당 학문분야에서 꾸준히 의미 있는 역할을 하면서 후계구도도 구축하고 지속해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일말의 희망과 위안을 주는 역할모델이 필요합니다. 국내외에 문화사와 미술사 분야의 연구소는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바르부르크연구소만큼 영감을 주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곳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 백삼십년 역사의 이 바르부르크연구소도 1886년 함부르크에 있는 한 학자가 연 사립도서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21년에 연구소로 진화하고, 1933년에는 나치독일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영국으로 옮겨져 살아남은 귀중한 연구소입니다. 또 하나의 대 전기는 그 가치를 알아 본 런던대학이 1944년 산하연구소로 영입한 것입니다. 지금은 고등학술연구원(School of Advanced Studies)에 소속되어 연구소와 도서관의 기능을 계속하면서 박사도 배출하고 있습니다.


아마 바르부르크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17년간(1959-1976) 이 연구소의 소장을 지낸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Gombrich 1909-2001)의 이름은 익숙할 것입니다. 바르부르크연구소의 명성의 원천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이 연구소를 통해 걸출한 학자가 배출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관련 학자들이 보인 지적 호기심과 성찰의 깊이, 학문적 소신과 치열한 연구태도, 그리고 확고한 이론에 바탕을 둔 연구저널과 저술의 출간입니다. 셋째, 설립자 바르부르크라는 위대한 학자가 세운 학문적 전통과 그 지속성입니다. 넷째,  런던대학과의 병합으로 탄탄한 미래를 보장받게 된 것입니다.


이 연구소를 알려면 먼저 설립자인 아비 바르부르크 (Aby Warburg 1866-1929. 원명은 Abraham인데 Aby로 불렸음)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성, 학문태도, 그가 추구한 미술사학 방법론, 그리고 수집한 유물과 자료 및 도서가 이후 이 연구소의 성격과 기본방향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미국까지 금융계를 주름잡던 유태계 은행가의 장남으로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장자 상속권을 포기하고 문화사와 미술사 학자의 길을 택한 독특한 인물입니다. 본(Bonn), 플로렌스(Florence)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작품 속의 신화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에 매료되어 이탈리아문화와 예술에 심취해 있었고, 당시 미술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Alois Riegl(1858-1905)로 대표되는 비엔나학파의 양식(style)과 구조분석(structural analysis) 중심의 방법론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편 막 태동 중이던 문화인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수년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면서 플로렌스의 아카이브를 뒤져 로렌조 메디치 서클 (Lorenzo Medici Circle)의 지적, 사회적 환경의 상세판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1) 로렌조 메디치 시대의 플로렌스인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화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2) 이교도의 맥락(비기독교적이라는 의미가 큼)에서 탄생한 고대의 상징물들이 왜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새 생명력을 갖고 다시 나타난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의 기억은 한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The memory of the past affects a culture)”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를 근대유럽문명의 전 분야-사회, 정치, 민속, 종교, 과학, 철학, 문학과 미술-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확대한 통섭적인 문화사로서의 미술사탐구가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신념과 접근방법을 통해 기존의 도상학(iconography)을 넘는 새 방법론, 즉 도상해석학(圖像解釋學, iconology)의 기틀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연구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는 사재를 털어 막대한 희귀자료와 약 6만 권의 문헌을 자택에 수집하고, 1886년에는 함부르크에 사설도서관인 ‘바르부르크문화학도서관’을 세웠습니다. 바로 이 도서관이 바르부르크연구소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바르부르크 다음으로 이 연구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유태계 미술사학자이며 종교학자였던 프리츠 작슬(Fritz Saxl 1890-1948) 함부르크대학 교수입니다. 1913년에 바르부르크의 조수로 들어가 도서관을 관리하다 1921년 연구소로 발전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9년 바르부르크 사후에는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나치독일의 집권이 시작되자 연구소의 영국 이전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비엔나의 드보락(Max Dvorak 1874-1921)과 베를린의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964-1945)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함부르크시절부터 바르부르크의 학풍을 이어받습니다. 그의 관심과 연구의 폭은 고대 페르시아 미트라신의 유적과 천문학 문헌으로부터 중세의 점성술과 신화에 나타난 이미지의 의미와 렘브란트(네덜란드) 및 벨라스케즈(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습니다.


프리츠 작슬은 친화력이 무척 강해 많은 학자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과 함께 연구소의 학문적 입장과 전통을 더욱 다져 나갔습니다. 그 중에는 함부르크대학 동료인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와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er 1874-1945)도 있었습니다. 파노프스키와는 공저로《Classical Mythology in Medieval Art(중세미술에서 고전적 신화)》를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총서로 1933년에 출간하였습니다. 바르부르크의 학풍이 물씬 풍기는 책입니다. 연구소 동료로는 2대 소장(1948-1954) 헨리 프랑크포트 (Henri Frankfort), 3대 소장(1955-1959) 게르투르드 빙(Gertrud Bing, 1922년부터 연구원이 됨), 4대 소장(1959-1976) 곰브리치가 대표적입니다. 프랑크포트는 고대 근동의 종교와 사회조직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찾는 연구에 정진한 학자로, 그의 참여로 연구소의 연구범위와 자료수집이 근동전역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바르부르크연구소를 최정상급 학문의 전당으로 올려놓은 인물은 바로 곰브리치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출신 유태계 학자로 빈 대학에서 미술사학과 고전건축학을 공부하고 나치의 위협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후 1936년 바르부르크연구소의 연구조교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1976년 은퇴할 때까지 40년간 연구소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런던대학 겸임교수로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의 역사와 미술사를 강의하고 옥스퍼드, 캠브리지, 코넬, 하바드 대학 등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1950년 저술한 《The Story of Art(서양미술의 이야기)》는 32개 국어로 번역되어 600만 부 이상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세계 각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렸을 뿐 아니라 연구소에도 더 큰 명성을 안겨 주었습니다.


곰브리치의 유명한 어록에 등장하는, “There really is no such thing as art. There are only artists(세상에 예술이라는 것은 없다. 예술가만 있을 뿐이다).”는 역설이 바로 이 책에 나오는데, 이 선언은 형식에 얽매여 인간적 요소(역할과 정신)가 배제된 ‘불모의 미술사’를 강타합니다. 그의 다른 명저로 《Symbolic Images》(1972), 《In Search of Cultural History》(1972), 《Art History and the Social Sciences》(1975), 《The Heritage of Apelles》(1976), 《The Sense of Order》(1979) 등이 있습니다. 곰브리치도 물론 바르부르크학파의 도상해석학적인 학풍을 택했지만, 심볼과 모티프의 의미 파악을 위해 심리학의 영역을 추가하고, 파노프스키와는 달리 작품 제작시대의 아카이브 자료와 텍스트의 가치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한편 뵐플린과 리글 등을 질타하면서도 그의 저서들 곳곳에서 형식(form)의 중요성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영국에 정착, 1933년 연구소에 들어가 1944년부터 런던대학의 겸임교수가 된 루돌프 비트카워 (Rudolf Wittkower 1901-1971)와 1931년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에 정착한 독일 하노버 출신의 유태계 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바르부르크의 런던시대에서는 빠진 파노프스키이지만 미국에서 바르부르크 학통의 계승자를 자임하였고, 1939년 명저《Studies in Iconology(도상해석학연구)》를 출간하였습니다. 비트카워는 헤겔-뵐플린의 학풍도 전수한 자로 유럽건축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바로크와 매너리즘 예술에 대한 당대의 편견과 폄하를 전면 수정하고 미술사에 확고하게 자리메김한 학자입니다. 1958년 출간한 《Art and Architecture in Italy 1600-1750》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입니다. 비트카워가 1941년 프리츠 작슬과 함께 연구소에서 순회사진전을 연 후 그 결과를 공저로 출간한 《British Art and the Mediterranean》(1948)은 ‘고전주의적 상징의 이동에 대한 문화적․도상학적 연구’로서 바르부르크연구소 연구방법론의 정당성을 입증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바르부르크연구소는 독일 탈출로 함부르크시대를 끝내고 런던시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1930년대 나치의 위협을 피해 독일·오스트리아 거주 유태계학자들이 영국과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것은 세계지성사의 판도를 바꾼 것으로, 우주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미국 이주와도 비교되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과 미국은 지적 후진국으로 미술사학보다는 미술감정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설립자가 유태계인 데다 유태계학자가 핵심멤버로 구성된 바르부르크연구소는 나치가 연구소 장서를 불온서적으로 압류해 소각시킬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유태인 박해가 시작된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작슬과 동료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나치 초기의 행정 허점을 이용해 국외운송 허가를 받아내고, 영국으로부터는 문화계에 막강한 힘을 가진 리경(Lord Lee of Fareham)과 사무엘 코톨드(Samuel Courtauld. 런던대 코톨드연구소의 설립자)의 도움 및 미국에 이주한 바르부르크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 냈습니다. 6명의 학자들과 사무실 기자재를 포함하여 바르부르크도서관 전체가 두 척의 화물선에 실려 런던에 도착한 것이 1933년 12월12일이었습니다. 이 엑소더스는 마치 한 편의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실화입니다. 바르부르크연구소의 영국 이전은 전후 독일지식계가 통탄하는 국가적 손실이 되었습니다.


바르부르크연구소의 힘은 역설적으로 비엔나학파에 대한 학문적 비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말 비엔나학파는 미술의 역사가 학문의 영역이며 정신사의 일부임을 인정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비엔나학파는 ‘오스트리아 미술·산업 박물관(Austrian Museum for Art and Industry)’의 리글(13년간 근무)을 중심으로 제들마이어(Hans Sedlmayr1896-1984)와 패흐트(Otto Pächt 1902-1988) 같은 미술사학자들이 모여 니체, 칸트, 헤겔. 벤야민 등 당시의 지성들과 심도 있는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양식-구조분석의 미술사방법론에 학문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20세기 초부터는 함부르크가 합세하여 비엔나와 함께 문화사학과 미술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고, 유럽지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양대 학파의 학문은 미술사학의 영원한 대립이며 심비오시스(symbiosis)의 관계인 ‘내용 대 형식(content vs. form)’사이의 줄다리기를 하면서 미술사학을 보다 흥미롭고 풍부한 학문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현재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술사학은 이들이 세운 학문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술사학이 미술사학 밖의 학문들과 소원해지고 지적 깊이를 잃으면서 그들이 쟁취했던 지성사회의 이슈 메이커로서의 위치와 리더십을 놓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시아뮤지엄연구소(Asia Museum Institute)가 창립된 지 이제 겨우 2년이 지났습니다. 이 연구소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이 나라에서 새로운 학문풍토를 만들어 보자는 희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동아시아의 문명공동체정신이 붕괴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문화사와 미술사가 지역적 편향성과 국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폭넓은 시각에서 문명사적 연구와 서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각오로 출발했고, 이 안에는 물론, 학문이 대중과 소통하는 박물관·미술관의 제 문제와 새 방향의 모색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1년 가을 ‘오늘의 뮤지엄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으로 출발하여 현재 약 40여명의 국내외 학자들로 구성된 조직도 갖추었습니다. 격년제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며, 국제심포지엄의 선정 주제에 따라 매년 3차례 이상 국내학자들의 세미나도 열고 있습니다. 학문적 목적을 이탈하지 않고 자율적 운영을 위해 정부기관의 지원에 기대지 않으려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 2014년 7월 김홍남 - 

작성 AMI
업데이트 2024.04.27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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