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Uzbekistan  2014년 1월28일-2월4일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골든 트라이앵글’(2회 연재)


2 부하라-사마라칸트-타쉬켄트, 눈 덮힌 옛 실크로드 도시로 가다 
부하라 (Bukhara)는 첫 눈에 반할 정도로 실크로드 교역도시의 면모와 이슬람문화역사의 현장분위기를 잘 보존하고 있었다. 히바와 달리 외곽성채는 없지만 내부에 궁성이 있고, 모스크들과 묘당, 교역소 건물들과 환전소가 있는 바자르, 공중목욕탕, 주거건물들, 골목길들이 형질변경 없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하였다. 사치스럽진 않지만 품위 있는 숙박시설들이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밤에 도착해 여정을 풀자 창밖으로 보이는 높고 낮은 돔들의 실루엣 야경이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다음날 영하의 새벽이었지만 동네를 열심히 걸어 돌아다녔다. 히바와 마찬가지로 건물들이 황토색 벽돌로 축조되고, 모스크의 돔과 미나레트, 그리고 건물주요부분만이 청, 녹, 백색 주조의 채유벽돌과 이슬람식타일로 장식되어 황토색에 찬란한 청록색의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히바에 비해 보존상태가 양호해서 더욱 화려하고 정제되어 보였다. 부하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유적 중 하나는 대상들이 모여들어 거래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교역품목별 거래소와 환전소가 모여 있는 소규모 바자르들이었다. 이것들은 실크로드의 교역 도시인 부하라의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16세기부터 내려 온 Toqi Zargaron 바자르가 아담하게 남아 있다. 또 하나는 이스마엘 샤마니(Ismail Samani, 9세기말-10세기 초에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페르시아계 최후의 왕조인 사마니조의 국왕)의 묘당으로 중앙아시아 건축사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부하라에서 본 전형적 바자르


바자르 한곳의 중앙에서 본 돔식 천정

 


 
10세기, 이스마엘 샤마니의 묘당(上)과 코벨돔식 내부(下). 이 두 장의 훌륭한 사진은 여행을 함께 한 한양대 건축학부 이강업교수가 제공한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전공이 미술사인지라 장식문양들에 눈이 갔다. 또 내가 관여하고 있는 AMI아시아뮤지엄연구소가 2015년 가을 ‘고대아시아의 돔식건축과 석굴암’(가제)을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을 준비 중인지라 어딜 가나 건물의 지붕과 천장 구조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라나 히바의 건축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돔식 지붕들이 여기저기 과거의 기념비처럼 세워놓은 유목민 전통 텐트의 돔 형태와 교차되었다. 돔식 지붕의 기원이 혹시 유목민의 주거텐트의 전통, 그 안에 내포된 하늘사상, 그리고 그 확장인 무덤건축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로마의 판테온과 그 돔이 2세기에 갑자기 완벽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아니었을 텐데….혹시 로마의 건축가들이 유라시아의 돔식 건축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예술가의 영감이란 시공도 문화의 벽도 넘나들 수 있지 않은가. 샤마니 묘당은 기본적으로는 황토벽돌 조적에 코벨돔식 지붕으로, 이슬람 이전의 전통 무덤양식을 고수하고 있다. 다양한 장식 문양을가진 벽돌들을 조합해 사용했을 뿐, 이슬람식 채유벽돌이나 타일장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슬람장식의 영향을 흡수하기 이전 중아아시아의 능묘건축들은 이같이 무척 검소하고 금욕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사각형 속 아치’ 형식의 입구문과 본체 상단의 아치형 채광창 같은 외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 10세기 능묘건축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혹시 돔식 건축의 발전을 두 갈래의 궤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하나는 로마식으로 로만아치의 발전궤적이며, 또 하나는 동방식으로 유목민족의 텐트 및 능묘의 발전궤적에서?” 내 머리 속에서 질문과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히바의 작고 큰 묘당들
 

 


히바에서 본 전통 텐트의 골조와 멀리 보이는 묘당



사마르칸트(Samarakand)로 가는 길은 눈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중간에 합류한 경찰차의 호위 덕분에 겨우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듣는 우즈벡의 피리소리가 간장을 에는 듯 너무 처절해서 한국인의 한(恨)의 몇 갑절은 되는 듯했다. 사마르칸트는 그 역사가 기원전 500년경으로 올라간다. 구도심 중앙에 자리 잡은 300년 역사의 레지스탄광장, 그 주위를 둘러 싼 모스크와 신학교 건물들이 흰 눈에 덮여 더욱 신비하고 장엄해 보였다. 그리고 아프라시압(Afrasiab)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Shah-i-Zinda 묘소는 귀족들과 높은 인물들의 묘당이 좌우로 울창하게 들어서 있는 ‘죽은 자의 계곡’이다. 이들 묘당은 대부분 정면과 내부가 화려한 이슬람타일로 장식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사마르칸트뿐 아니라 동방의 큰 빛, 울르그벡(Ulugbek)의 자취를 찾아 간 곳은 울르그벡 천문대와 학교유적이었다. 티무르의 손자였던 울르그벡(Ulugbek)왕이 통치하는 40년간 사마르칸트는 중세시대에 세계 과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 자신 천문학자로서 이 언덕 위에 과학학교를 세우고, 뛰어난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을 키워냈다. 그리고는 1428년부터 1429년까지 독특한 건축양식의 천문대를 만들었다. 한반도 세종대왕시기의 역법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세상의 위대한 종교와 지식은 실로 국경이 없는 것 같다.


Shah-i-Zinda묘소
 


울르그벡천문대(上)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는 천문대 구조(下).(위 두 사진은 이강업 교수 제공)



사실, 사마르칸트에 대한 내 로망이 시작된 것은 내 나이 30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미술사를 공부하며 접한 Edward Hetzel Schafer(1991년 사망)의 1963년 저서, The Golden Peaches of Samarkand: A Study of T'ang Exotics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 미지의 세계로 언젠가 가보고 싶었다. 샤프교수(버클리대 중국학교수)가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적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책에서 읽은 당나라의 장안에 도착하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상인들과 그들이 전한 문물이 당나라 중국에 끼친 영향, 그 중 7세기에 사마르칸트에서 당 황실에 바쳤다는 황금빛의 큰 복숭아에 대한 이야기는 내 젊은 시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마침내 이 여행으로 그 꿈을 실현하게 되었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7세기 중엽의 고구려 사절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어 국내 학계의 관심을 끌어 왔던 소그디아나(Sogdiana)의 아프라시압 궁궐벽화와 궁터가 있고, 한반도 경주에서 보이는 원형 문양과 그 속에 보이는 連珠文이 통상 페르시아계 소그드문양으로 알려져 있어 이를 사마르칸트에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설렘이 강했다.  


눈덮힌 아프라시압궁의 옛터



 아프라시압(Afrasiab)으로 가면서 고대부터 실크로드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지나다녔다는 옛길을 만났다. 폐허가 된 옛 궁터는 눈 덮인 언덕에 불과하였다. 다들 성터 언덕 북서쪽 기슭의 다니엘 선지자의 묘당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에 황급히 언덕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군데군데 묘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지역은 Shah-i-Zinda를 비롯해 오랜 세월 묘지들이 운집된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발굴된 아프라시압궁의 오리지널 벽화는 오래 전부터 이곳 아프라시압 고고학박물관에 옮겨져 있었으나, 박물관도 허술하고 떼어다 놓은 벽화의 보존도 제대로 되지 않아 벽화가 전체적으로 퇴색되고 세부묘사가 사라져 있었다. 고구려인의 조우관(鳥羽冠, 새의 깃으로 장식한 모자)을 쓰고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를 찬 두 고구려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벽화의 시기는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어 왔다. 권영필교수(AMI아시아뮤지엄연구소 대표)는 고구려 멸망 직전으로 보고 이 두 인물이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보낸 밀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아프라시압 궁궐터 건너편에 있는 박물관과 벽화실
 


아프라시압 궁궐벽화의 원래 색이 다소 남아 있는 상태의 사진



현재 아프라시압박물관에 전시된 벽화의 세부



아프라시압에서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또 하나는 연주문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각종 동식물문을 넣은 큰 메달형태의 원형장식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전시된 용도불명의 대형 돌에 새겨진 이런 문양이 페르시아계 소그드문양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프라시압 벽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또 이 문양이 고대 궁궐 벽화 뿐 아니라 유적지 주변과 박물관의 울타리에서도 보여 아프라시압의 엠블럼으로 널리 사용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옥외에 전시된 7-8세기 경의 석물에 보이는 원형장식과 연주문
 


우즈벡역사박물관의 아프라시압 궁궐벽화 복제화의 일부와 왼쪽 인물이 들고 있는 물건에서 보이는 유사 문양


2월3일은 7일간의 답사를 끝내고 귀국하는 날이다. 타슈켄트에서 밤 11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어떤 시간의 낭비 없이 이렇게 알차게 진행된 여행도 드물었던 것 같다. 시각적인 공부를 하다 보니 어딜 가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많고 생각할 게 많아 지치기도 한다. 늙어 가는데 언젠가 그런 욕심을 버리고 해변가에 누워 바닷소리도 들으면서 머리를 쉴 수 있는 여행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사마르칸트발 타슈켄트행 기차에 몸을 싣고 약 4시간을 달렸다. 차창 밖은 온통 눈 천지였고 그 황량한 하얀 풍경에 영화 ‘닥터지바고’를 연상하면서 내 머리에는 영화 주제음악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을 이용해 방문한 타슈켄트 외곽의 한인 집단촌, ‘까레이스키 마을’ 앞의 김병화박물관에 들어서자 그 순간 이전까지 내가 누린 모든 것들이, 내 존재의 지반이 흔들리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수십 년 전 이렇게 추웠던 12월 어느 날 연해주에서 살다 갑자기 화물기차에 실려 이 먼 곳으로 강제집단이주를 당한 한인들, 오다가 20만 명 가운데 15만 명이 죽고 5만 명 정도가 남아 이 추운 겨울의 허허벌판에 던져졌던 사람들, 그 이후의 비참한 삶, 이들을 북돋아 협동농장을 일으키고 구소련 전역에서 최고의 모범사례를 만들어 낸 김병화(1905-1974)의 비장한 승리. 그들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렇게 한 많은 근대사를 지나왔고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내가 있다는 자각에 가슴이 떨렸다.


김병화박물관에서



인근의 전통 제지마을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전통공예마을이 아니었다. 7-8세기 중국 당나라의 실크로드교역로 지배와 서역경영, 아랍 아바스왕조-티베트연합군의 대당항쟁과 치열한 중앙아시아 패권 쟁탈전, 고구려의 멸망과 그 유민들의 운명 등이 교차되는 역사의 한 조각이었다. 타슈켄트는 750년에 이미 고구려유민 출신 고선지(高仙芝)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에 점령되었다. 이듬해 751년 고선지장군이 이끈 당의 군대는 타슈켄트 인근의 탈라스강 유역(지금은 카자흐스탄 영토)에서 벌린 탈라스전투(Battle of Talas)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패전 결과 포로로 끌려 온 중국 제지기술자들로 인해 여기서 새 제지술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세계로 그 기술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나라에서 유민이 노예 신분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사가 되고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고선지도 그의 부친도 이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탈라스전투의 패배로 기반이 약해진 고선지장군은 부하의 모함으로 756년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후세에 들어 고선지의 사적은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의 중앙아시아 답사로 발굴되고 재인식되었다.
 


타슈켄트 외곽의 전통 제지마을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는 교역의 길, 종교의 길, 외교의 길, 침략과 전쟁의 길로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견뎌 왔고, 동서 문화의 가교가 되고 또 그 내부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런데 주마간산식 여행으로 얼마나 보고 배울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그래도 가 본 것과 안 가본 것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간 짬짬이 실크로드탐방 여행을 시도해 왔다. 아직 못 가본 데로 주요루트인 투르판(Turfan)-카슈가르(Kashgar)구간과 이란-이라크 구간이 남아 있다.


2014년 7월4일 김홍남 

작성 AMI
업데이트 2019.05.2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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